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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서양미술사] 루브르에서 2년간 사라졌던 모나리자의 진실

이슈패치 2025. 7. 27. 22:00

루브르에서 2년간 사라졌던 모나리자의 진실

루브르에서 2년간 사라졌던 모나리자의 진실

1911년 근대서양미술사의 전환점을 만든 사건 중 하나인 모나리자의 도난 사건은, 루브르에서 2년이라는 기나긴 시간 동안 흔적 없이 사라졌다가 마침내 돌아오며 이 작품 자체는 물론 근대서양미술사에서의 위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이 글에서는 그 사건의 전말과 예술사적 의미를 깊이 탐색한다.

1. 사건의 배경: 루브르와 근대서양미술사의 맥락

  • 16세기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모나리자(La Gioconda)는 원래 이탈리아에 있었지만, 프랑수아 1세가 사들여 1516년 프랑스로 가져왔다. 이후 프랑스 왕실 소장품이 되어 근대서양미술사의 중요한 유산이 되었다.
  • 19세기 중반부터 회화 비평가들 사이에서 고전 회화의 걸작으로 평가받았으나, 대중적 인지도는 비교적 낮았다.

2. 1911년 8월: 도난의 시작

  • 1911년 8월 21일, 루브르 미술관이 문을 닫은 날, 전직 루브르 직원이었던 이탈리아인 빈첸초 페루지아가 노동자 복장(흰 블라우스)을 입고 출근한 척 등장한다.
  • 그는 청소용 사물함에 숨어있다가, 관람이 끝난 이후 살롱 카레(Salon Carré) 전시실에서 모나리자를 떼어낸 뒤, 계단 쪽에서 액자와 유리를 분리하고 옷 안에 숨겨 밀반출했다.

3. 도난 사실 발각과 초기 대응

  • 다음 날 아침 화가 루이 브루(RLouis Béroud) 등이 작품을 보존하기 위해 라이트를 설치하려 했으나, 모나리자가 걸려 있던 자리에 네 개의 철못만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 루브르 측에 신고한다.
  • 루브르는 일주일간 폐관하고 보안 점검 및 직원 면담, 루브르 담당자 해임, 수만 장의 전단 발송, 40,000프랑 보상금 등을 내걸며 사상 초유의 수사를 시작했다.

4. 근대서양미술사에서의 대중적 전환

  • 이 사건으로 인해 모나리자는 순식간에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진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작품이었다가, 도난 사건이 계기가 되어 현대 대중문화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 루브르 내부에서는 빈 공간을 보려는 사람들이 더 몰리는 역설적 상황이 벌어졌다. 이른바 “빈 자리 관광” 현상이다.

5. 수사 혼란과 피카소, 아폴리네르 연루설

  • 수사는 전방위적으로 전개되었고, 당시 전위 예술가였던 기욤 아폴리네르파블로 피카소가 연루되기도 한다. 특히 피카소는 과거 루브르에서 훔친 조각품을 가지고 있었던 관계로 의심받았으나, 결국 무혐의로 풀려났다.
  • 이후 에두아르도 발피에르뇨(Eduardo de Valfierno) 라는 사람이 복제본 판매 계획으로 이 사건을 기획했다는 이야기도 나왔지만, 신빙성은 확실하지 않다.

6. 모나리자의 귀환: 2년 후의 반전

  • 페루지아는 2년간 파리의 자신의 방(호텔 또는 아파트)에 이중 바닥의 나무 여행가방에 모나리자를 숨겨 보관했다.
  • 1913년 11월, 그는 “Leonardo Vincenzo”라는 필명으로 이탈리아 피렌체의 골동품 상인 **알프레도 제리(Alfredo Geri)**에게 연락하여 작품 반환을 제의한다. 이 소식을 들은 제리는 우피치(Uffizi) 갤러리 관장을 불러 인증하고 경찰에 통보했다.
  • 페루지아는 체포되었고 그의 모나리자는 이탈리아 전역에서 전시된 뒤, 1914년 1월 4일 루브르로 공식 반환되었다.
  • 그는 이탈리아 법정에서 “애국적 동기”를 주장했고, 원래 1년 15일 형이었으나 7개월 9일로 감형받았다.

7. 사건이 근대서양미술사에 미친 의미

  • 보안 강화와 전시 정책 변화: 이후 루브르는 보안 시스템을 대대적으로 개편하고, 유리 케이스·출입관리 강화 등 미술관 운영 전반이 바뀌었다.
  • 문화 아이콘의 탄생: 모나리자는 이후 포스트카드, 영화, 대중음악, 팝아트 등 다양한 문화 영역에서 재생산되며, 근대대중문화 속 대표 미술사적 아이콘이 되었다.
  • 예술사 전공자 및 학생들 사이에서 ‘도난 이후 가치’에 대한 논쟁의 소재로 자리잡으며, 근대서양미술사 공부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사례가 되었다.

8. 현대 루브르와 모나리자의 현재

  • 최근 루브르는 모나리자의 관람객 과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별도의 전용 전시실과 방문 동선 개편을 검토 중이다. 이는 관람객이 다른 작품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도록 한다는 문제 의식에서 비롯된 조치이다.
  • 또한, 2031년 완공 예정인 모나리자 전용 박물관 프로젝트도 검토 중이다.

9. 근대서양미술사 속 불멸의 미소

사건 1911년 루브르에서 빈첸초 페루지아가 모나리자를 훔침
사라진 기간 약 2년 (1911년 8월 ~ 1913년 말)
복귀 시점 1914년 1월 루브르 복귀
역사적 효과 대중적 명성 폭발, 박물관 정책 변화, 예술사 재해석
미술사적 위치 근대서양미술사의 전환점이자 문화 아이콘의 기원
 

이처럼 루브르에서 2년간 사라졌던 모나리자의 도난 사건은 단순한 절도 사건을 넘어, 근대서양미술사에서 회화의 사회문화적 위상과 미술관 시스템 변화를 촉진한 실질적 분수령이었습니다.
모나리자는 그 미소만큼이나 오랜 시간 우리 미술사 속에 살아 숨 쉬며, 근대서양미술사 내에서 가장 상징적인 작품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10. 흔적 없는 실종이 낳은 문화적 서스펜스

  • 모나리자 사라짐 자체가 역사적 사건이었다
    실제로 모나리자의 부재 자체가 언론의 중심이 되면서, 관람객들은 사라진 벽 앞에 꽃과 쪽지를 남기는 의례처럼 진지한 추모 행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이는 단순한 회화 유실이 아닌, 예술 전시가 대중과 맺는 관계를 재정의하는 순간이었다.
  • 이 경험은 관람자의 기대감과 미술관 경험 자체를 변화시켰다. 루브르는 모나리자의 부재 한 자리에 몰려든 인파를 통해, 예술이 비어 있을 때 느껴지는 긴장마저 상품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11. 근대서양미술사 속 미디어 전략과 ‘숭배 대상의 탄생’

  • 언론은 사건을 반복 재생산하며, 모나리자를 단순한 르네상스 걸작이 아닌 **‘문화 아이콘’**으로 재구성했다. 사진과 삽화, 도난 소식이 전 세계 신문에 실리면서 모나리자는 ‘보이지 않지만 가장 원했던 이미지’로 떠올랐다.
  • 이 사건을 계기로 미술 작품의 유명세가 주목의 규모와 질을 결정하게 된다는 인식이 생겨났고, 이는 이후 아티스트 셀러브리티문화미술시장 금융화의 전조가 되었다.

12. 형사제도와 인식의 전환

  • 당시 프랑스는 여전히 Bertillon 식 신체 계측식 신원확인에 의존했는데, 페루지아가 남긴 지문이 사고 체포의 단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활용되지 않았다. 1911년 사건은 바로 이 기법의 한계를 폭로하며, 지문 기록 중심의 다크틸로스코피(dactyloscopy) 채택을 촉진했다.
  • 이처럼 사회의 형사 제도 변화 역시, 예술사와 맞닿아 있는 역사적 흐름임을 보여준다.

13. 후대 예술가들의 반응과 재해석

  • 모나리자는 도난 이후 마르셀 뒤샹, 살바도르 달리, 앤디 워홀 등 여러 현대 예술가에게 영감의 대상이 되었다. 뒤샹은 모나리자를 풍자하고, 달리는 초현실주의적으로 다시 그리고, 워홀은 대량 인쇄 예술로 복제함으로써 이미지 재생산과 대중 문화 속 미술의 역할을 재고하게 했다.
  • 이런 예술계 내 반응은, 근대서양미술사의 흐름 속에서 모나리자가 단지 회화의 역사적 작품이 아니라 '이미지론적 아이콘'으로 진화했음을 보여준다.

14. 경제적 파급력과 입장객 편중

  • 오늘날 루브르의 관람객 수는 연간 8백만 ~ 1천만 명 수준이며, 그중 약 80%가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방문한다는 통계도 있다.
  • 이는 관람객 과밀 문제, 다른 걸작들이 상대적으로 훼손되는 현상, 박물관 운영 비용 편중 등 문화 자원 분배의 불균형 문제를 초래하기도 한다. 최근 루브르는 이를 해결할 전용 전시실 건립과 관람 동선 개편을 검토 중이다.

15. 근대서양미술사 연구에서의 사례적 가치

  • 학계에서는 이 사건을 중심으로 작품의 '결여'가 어떻게 작품의 의미를 강화하는가, 미디어와 대중이 이미지 권력을 형성하는 과정, 예술품의 희소성과 상징 자본이 상호작용하는 메커니즘을 연구 주제로 삼는다.
  • 따라서 근대서양미술사 내에서 모나리자의 도난 사건은 단순한 사건기록이 아니라, 회화가 어떻게 사회경제적·문화적 상징으로 ‘전환’되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모형이다.

16. 모나리자 이후의 미술관 발전 방향

  • 루브르는 이후 관람·보안·수익구조를 전면 재설계했다. 보호 유리 도입, 출입·큐 시스템 도입, 경비 인력 배치, 그리고 오늘날 예술품 브랜드화 전략을 통해 방문객의 체험 시간을 조절하고 수익성을 극대화했다.
  • 이는 미술관을 단순 전시공간이 아닌 관광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일부로 전환시킨 신호탄이었다고 볼 수 있다.

17. 결론: 근대서양미술사 속, 사라짐이 낳은 가치

이처럼 모나리자의 1911~13년 실종과 귀환 이야기는 근대서양미술사 내 예술품이 어떻게 사회적 상징이 되고 브랜드가 되는지, 그리고 대중·미디어·시장·제도가 어떻게 하나의 작품을 아이콘으로 재구성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모나리자의 미소는 단지 르네상스 회화 기술의 산물이 아니라, 사라짐과 돌아옴, 미디어와 대중의 합작을 통해 완성된 근대문화의 서사적 장치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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