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브르에서 2년간 사라졌던 모나리자의 진실
1911년 근대서양미술사의 전환점을 만든 사건 중 하나인 모나리자의 도난 사건은, 루브르에서 2년이라는 기나긴 시간 동안 흔적 없이 사라졌다가 마침내 돌아오며 이 작품 자체는 물론 근대서양미술사에서의 위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이 글에서는 그 사건의 전말과 예술사적 의미를 깊이 탐색한다.
1. 사건의 배경: 루브르와 근대서양미술사의 맥락
- 16세기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모나리자(La Gioconda)는 원래 이탈리아에 있었지만, 프랑수아 1세가 사들여 1516년 프랑스로 가져왔다. 이후 프랑스 왕실 소장품이 되어 근대서양미술사의 중요한 유산이 되었다.
- 19세기 중반부터 회화 비평가들 사이에서 고전 회화의 걸작으로 평가받았으나, 대중적 인지도는 비교적 낮았다.
2. 1911년 8월: 도난의 시작
- 1911년 8월 21일, 루브르 미술관이 문을 닫은 날, 전직 루브르 직원이었던 이탈리아인 빈첸초 페루지아가 노동자 복장(흰 블라우스)을 입고 출근한 척 등장한다.
- 그는 청소용 사물함에 숨어있다가, 관람이 끝난 이후 살롱 카레(Salon Carré) 전시실에서 모나리자를 떼어낸 뒤, 계단 쪽에서 액자와 유리를 분리하고 옷 안에 숨겨 밀반출했다.
3. 도난 사실 발각과 초기 대응
- 다음 날 아침 화가 루이 브루(RLouis Béroud) 등이 작품을 보존하기 위해 라이트를 설치하려 했으나, 모나리자가 걸려 있던 자리에 네 개의 철못만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 루브르 측에 신고한다.
- 루브르는 일주일간 폐관하고 보안 점검 및 직원 면담, 루브르 담당자 해임, 수만 장의 전단 발송, 40,000프랑 보상금 등을 내걸며 사상 초유의 수사를 시작했다.
4. 근대서양미술사에서의 대중적 전환
- 이 사건으로 인해 모나리자는 순식간에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진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작품이었다가, 도난 사건이 계기가 되어 현대 대중문화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 루브르 내부에서는 빈 공간을 보려는 사람들이 더 몰리는 역설적 상황이 벌어졌다. 이른바 “빈 자리 관광” 현상이다.
5. 수사 혼란과 피카소, 아폴리네르 연루설
- 수사는 전방위적으로 전개되었고, 당시 전위 예술가였던 기욤 아폴리네르와 파블로 피카소가 연루되기도 한다. 특히 피카소는 과거 루브르에서 훔친 조각품을 가지고 있었던 관계로 의심받았으나, 결국 무혐의로 풀려났다.
- 이후 에두아르도 발피에르뇨(Eduardo de Valfierno) 라는 사람이 복제본 판매 계획으로 이 사건을 기획했다는 이야기도 나왔지만, 신빙성은 확실하지 않다.
6. 모나리자의 귀환: 2년 후의 반전
- 페루지아는 2년간 파리의 자신의 방(호텔 또는 아파트)에 이중 바닥의 나무 여행가방에 모나리자를 숨겨 보관했다.
- 1913년 11월, 그는 “Leonardo Vincenzo”라는 필명으로 이탈리아 피렌체의 골동품 상인 **알프레도 제리(Alfredo Geri)**에게 연락하여 작품 반환을 제의한다. 이 소식을 들은 제리는 우피치(Uffizi) 갤러리 관장을 불러 인증하고 경찰에 통보했다.
- 페루지아는 체포되었고 그의 모나리자는 이탈리아 전역에서 전시된 뒤, 1914년 1월 4일 루브르로 공식 반환되었다.
- 그는 이탈리아 법정에서 “애국적 동기”를 주장했고, 원래 1년 15일 형이었으나 7개월 9일로 감형받았다.
7. 사건이 근대서양미술사에 미친 의미
- 보안 강화와 전시 정책 변화: 이후 루브르는 보안 시스템을 대대적으로 개편하고, 유리 케이스·출입관리 강화 등 미술관 운영 전반이 바뀌었다.
- 문화 아이콘의 탄생: 모나리자는 이후 포스트카드, 영화, 대중음악, 팝아트 등 다양한 문화 영역에서 재생산되며, 근대대중문화 속 대표 미술사적 아이콘이 되었다.
- 예술사 전공자 및 학생들 사이에서 ‘도난 이후 가치’에 대한 논쟁의 소재로 자리잡으며, 근대서양미술사 공부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사례가 되었다.
8. 현대 루브르와 모나리자의 현재
- 최근 루브르는 모나리자의 관람객 과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별도의 전용 전시실과 방문 동선 개편을 검토 중이다. 이는 관람객이 다른 작품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도록 한다는 문제 의식에서 비롯된 조치이다.
- 또한, 2031년 완공 예정인 모나리자 전용 박물관 프로젝트도 검토 중이다.
9. 근대서양미술사 속 불멸의 미소
사건 | 1911년 루브르에서 빈첸초 페루지아가 모나리자를 훔침 |
사라진 기간 | 약 2년 (1911년 8월 ~ 1913년 말) |
복귀 시점 | 1914년 1월 루브르 복귀 |
역사적 효과 | 대중적 명성 폭발, 박물관 정책 변화, 예술사 재해석 |
미술사적 위치 | 근대서양미술사의 전환점이자 문화 아이콘의 기원 |
이처럼 루브르에서 2년간 사라졌던 모나리자의 도난 사건은 단순한 절도 사건을 넘어, 근대서양미술사에서 회화의 사회문화적 위상과 미술관 시스템 변화를 촉진한 실질적 분수령이었습니다.
모나리자는 그 미소만큼이나 오랜 시간 우리 미술사 속에 살아 숨 쉬며, 근대서양미술사 내에서 가장 상징적인 작품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10. 흔적 없는 실종이 낳은 문화적 서스펜스
- 모나리자 사라짐 자체가 역사적 사건이었다
실제로 모나리자의 부재 자체가 언론의 중심이 되면서, 관람객들은 사라진 벽 앞에 꽃과 쪽지를 남기는 의례처럼 진지한 추모 행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이는 단순한 회화 유실이 아닌, 예술 전시가 대중과 맺는 관계를 재정의하는 순간이었다. - 이 경험은 관람자의 기대감과 미술관 경험 자체를 변화시켰다. 루브르는 모나리자의 부재 한 자리에 몰려든 인파를 통해, 예술이 비어 있을 때 느껴지는 긴장마저 상품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11. 근대서양미술사 속 미디어 전략과 ‘숭배 대상의 탄생’
- 언론은 사건을 반복 재생산하며, 모나리자를 단순한 르네상스 걸작이 아닌 **‘문화 아이콘’**으로 재구성했다. 사진과 삽화, 도난 소식이 전 세계 신문에 실리면서 모나리자는 ‘보이지 않지만 가장 원했던 이미지’로 떠올랐다.
- 이 사건을 계기로 미술 작품의 유명세가 주목의 규모와 질을 결정하게 된다는 인식이 생겨났고, 이는 이후 아티스트 셀러브리티문화와 미술시장 금융화의 전조가 되었다.
12. 형사제도와 인식의 전환
- 당시 프랑스는 여전히 Bertillon 식 신체 계측식 신원확인에 의존했는데, 페루지아가 남긴 지문이 사고 체포의 단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활용되지 않았다. 1911년 사건은 바로 이 기법의 한계를 폭로하며, 지문 기록 중심의 다크틸로스코피(dactyloscopy) 채택을 촉진했다.
- 이처럼 사회의 형사 제도 변화 역시, 예술사와 맞닿아 있는 역사적 흐름임을 보여준다.
13. 후대 예술가들의 반응과 재해석
- 모나리자는 도난 이후 마르셀 뒤샹, 살바도르 달리, 앤디 워홀 등 여러 현대 예술가에게 영감의 대상이 되었다. 뒤샹은 모나리자를 풍자하고, 달리는 초현실주의적으로 다시 그리고, 워홀은 대량 인쇄 예술로 복제함으로써 이미지 재생산과 대중 문화 속 미술의 역할을 재고하게 했다.
- 이런 예술계 내 반응은, 근대서양미술사의 흐름 속에서 모나리자가 단지 회화의 역사적 작품이 아니라 '이미지론적 아이콘'으로 진화했음을 보여준다.
14. 경제적 파급력과 입장객 편중
- 오늘날 루브르의 관람객 수는 연간 8백만 ~ 1천만 명 수준이며, 그중 약 80%가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방문한다는 통계도 있다.
- 이는 관람객 과밀 문제, 다른 걸작들이 상대적으로 훼손되는 현상, 박물관 운영 비용 편중 등 문화 자원 분배의 불균형 문제를 초래하기도 한다. 최근 루브르는 이를 해결할 전용 전시실 건립과 관람 동선 개편을 검토 중이다.
15. 근대서양미술사 연구에서의 사례적 가치
- 학계에서는 이 사건을 중심으로 작품의 '결여'가 어떻게 작품의 의미를 강화하는가, 미디어와 대중이 이미지 권력을 형성하는 과정, 예술품의 희소성과 상징 자본이 상호작용하는 메커니즘을 연구 주제로 삼는다.
- 따라서 근대서양미술사 내에서 모나리자의 도난 사건은 단순한 사건기록이 아니라, 회화가 어떻게 사회경제적·문화적 상징으로 ‘전환’되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모형이다.
16. 모나리자 이후의 미술관 발전 방향
- 루브르는 이후 관람·보안·수익구조를 전면 재설계했다. 보호 유리 도입, 출입·큐 시스템 도입, 경비 인력 배치, 그리고 오늘날 예술품 브랜드화 전략을 통해 방문객의 체험 시간을 조절하고 수익성을 극대화했다.
- 이는 미술관을 단순 전시공간이 아닌 관광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일부로 전환시킨 신호탄이었다고 볼 수 있다.
17. 결론: 근대서양미술사 속, 사라짐이 낳은 가치
이처럼 모나리자의 1911~13년 실종과 귀환 이야기는 근대서양미술사 내 예술품이 어떻게 사회적 상징이 되고 브랜드가 되는지, 그리고 대중·미디어·시장·제도가 어떻게 하나의 작품을 아이콘으로 재구성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모나리자의 미소는 단지 르네상스 회화 기술의 산물이 아니라, 사라짐과 돌아옴, 미디어와 대중의 합작을 통해 완성된 근대문화의 서사적 장치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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